1980년 4월,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계엄군이 탄광촌으로 향했다..
역사의 상처를 회복하고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성찰
군부독재 시절 사북을 할퀴었던 다양한 국가 폭력의 흔적
45년이 지난 지금.. 국가의 사과로 치유가 되어야
2024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 2025 EIDF 수상

1980년 4월 22일, 동원탄좌 정문 앞에서 시위하는 광부와 부녀자들 (사진=앳나인필름)
(뉴스9=이호철 기자) 23일 용산CGV에서 오는 29일 정식 개봉을 앞둔 ‘1980 사북’ (배급사 앳나인필름) 미디어 초청 특별 시사회가 열렸다.
사북 사건은 비상계엄령이 내려졌던 1980년 4월, 강원도 정선군 사북의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서 노조지부장 사퇴 등을 요구하며 농성 중인 광부들에게 경찰 지프차가 돌진하여 치명상을 입힌 것을 계기로 일어난 대규모 유혈사태다. 이 과정에서 순경이 사망하는 등 무리한 진압에 투입되었던 다수의 경찰이 피해를 입었고, 광부와 부녀자 28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80년 4월, 이날 일어난 사북 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오랫동안 잊힌 사건이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초, 민주화의 거센 흐름이 전국을 뒤흔들던 시기, 광부들은 부당한 노동 현실과 어용 노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그들은 국가에 의해 ‘폭도’로 내몰렸으며 분노와 절규는 역사의 뒤 페이지로 밀려났다.
지난 2008년 제1기 진실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약칭 ‘진실화해위원회’)가 사북 사건과 관련하여 공권력에 의한 고문과 가혹행위 사실을 인정하고 국가 사과와 피해자 구제를 권고하였고, 2015년 이후 이원갑, 신경, 강윤호 등 사건 관련자들이 재심을 통해 잇따라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사북 사건은 국가 폭력 사건이자 심각한 인권 침해 사건으로서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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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사북항쟁 당시 고한지서에 파견된 진압군. (사진=정선지역사회연구소)
사북 사건의 일지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980. 04. 21 광부들 노동조합 사무실에 집결해서 항의 농성 중 경찰 지프차 뺑소니 사건 발생,
이에 광부들 사북지서 파괴
▸1980. 04. 22 사북광업소로 통하는 안경다리에서 광부들과 진압경찰 사이의 투석전
▸1980. 04. 22 시위 진압을 위해 경찰 사북 안경다리 진입 시도 투석전 끝에
광부들이 바리케이드 치고 사북 봉쇄. 이 과정에 영월 경찰서 이덕수 순경 사망
▸1980. 04. 22 광부들, 노조지부장 아내 집단폭행
▸1980. 04. 22 23시, 계엄군 이동
▸1980. 04. 23 공수부대원들이 증산 초등학교에서 대기. 김성배 강원도지사 광부들과 협상 시도
▸1980. 04. 23 16시, 계엄군 추가 배속
▸1980. 04.23 19시 10분, 이동 지시 하달
▸1980. 04. 24 새벽 4시, 합의사항 타결
▸1980. 05. 07 “움직이면 죽인다.” 발포 예고 광부 및 주민들을 연행하여 고문.

1980년 4월 22일, 사북광업소로 통하는 안경다리에서 광부들과 진압경찰 사이의 투석전 (사진=앳나인필름)
박봉남 감독의 ‘1980 사북’은 45년의 세월을 넘어, 그날의 진실과 목소리를 담았다. 어렵게 확보한 아카이브 재현을 넘어, 사건의 당사자들과 관계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세상에서 잊힌 사북의 시간을 다시 호출하게 한다. 당시 광부들과 그 가족, 진압에 투입되었던 경찰, 그리고 현장 취재했던 기자까지, ‘1980 사북’은 각각의 위치에서 이 사건을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를 더해 기억을 넘어 기록과 복원으로 나아간다. 박 감독은 시사회 후 질의 응답 시간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 시대의 기자들에게 아카이브에 큰 도움을 받았다. 이들을 통해 언론인의 역할을 경험했다”
“2019년 봄 기록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3년을 생각했던 것이 100여명 인터뷰를 거치며 5년이 되었고, 개봉까지 오는데는 6년이 걸렸다” “역사는 기록되지 않으면 안된다”
박 감독은 “폭동과 항쟁, 사북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두 개의 시선이 존재한다. 모든 이야기를 그의 말처럼 ‘1980 사북’은 사북 사건을 단순히 소개하는 것에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사건의 재구성을 통해 객관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라고 말했다치지 않고, 묻혔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모두에게 책임을 묵직하게 일깨울 예정이다. 무엇보다 사북 사건을 다각도로 정면으로 마주하는 ‘1980 사북’은 특정 공간과 시대를 넘어 국가가 어떤 고통을 외면해 왔는지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작품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 유효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황인욱 정선지역사회연구소 소장은 ‘상상한 영화 대 완성된 영화’라는 말을 했다.폐광에 대한 기억, 폐광연대투쟁의 산물로 강원랜드가 있지만, 사북의 진실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며 황 소장이 광부의 아들이었기에 못만나는 사람에 대한 취재. 일방적이지 않은 진실을 담은 박 감독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 존경한다”고 밝혔다. “기록이 사건을 지배한다. 폭력적 기록만 남아 가정의 파괴. 고문의 기록을 빼고는 사북을 말할 수 없다.“80년4월이 80년5월로 묻혔다”며 그로부터 고문의 시작이었고, 민간인 200명 집단 고문 사건
피해자들은 험난한 생활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투쟁의 당사자는 아무런 해택을 못받고, 다수가 안산으로 이주했지만 이젠 남아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전국의 국가폭력피해자 드러나지 않는다. 국가가 사과가 선행되어야 실제 피해자 드러난다” 고 덧붙였다.
지난 2025년 4월. 영월에서 가진 특별상영회는 주로 경찰을 대상으로 진행했었다. 어떤 의미가 있는가란 질문에 박 감독은 “고마웠다. 화해의 자리였다고 말하며 “영화로 인해 사건이 남긴 상처가 드러났고, 국가사죄를 요구하는 서명부도 전달을 할 수 있었다. 이게 영화의 역할(책임을 다루는 공론화)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3일 용산CGV에서 열린 1980 사북 기자간담회, (왼쪽부터)한경수 프로듀서,박봉남 감독,황인욱 정선지역사회연구소 소장 (사진=앳나인필름)
박 감독과 함께 영화를 만든 황 프로듀서는 ‘1980 사북’은 모든 피해자들 다루고 있어 모두의 지지 받지 못했다. “한쪽편을 들어야 영화만들기 편하지만 그 쉬운길 가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특히 황 프로듀서는 마지막 발언을 하며 언론인에게 한 가지 당부했다. “기사를 쓰실 때 사북 사건과 관련 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진 ‘지부장 폭행 사진’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아직 당사자가 아직 생존에 계시기에 이 사진을 쓰는 건 또 다른 상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12월 3일 각각 영화제 상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12.3 비상계엄을 듣고 어떤 기분이었나라는 질문에 박 감독과 황 프로듀서는 이렇게 답했다.
박 감독은 “디엠지 영화제 상영후 돌아오는 길에 비상계엄 겪으며 그날 밤 달려와 12.3 계엄을 막은 시민들과 양심적인 군인, 국회의원과 보좌관에게 감사한다” 어두운 시대는 언제든 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황 프로듀서는 “12.3일 독립영화제 상영 후 돌아오는길에 듣고 광주가 고향인 5.18 당시 초등생이었다” 며 “사북의 200명의 체포도 계엄법9조로 가능 했듯이 200명의 고통이 모두의 고통이다”라고 전했다.
아울러 시사회를 지켜본 국민대 이창현 교수는 “언론의 사건 프레임에 갖춰서 우리는 45년만에 지연된 정의를 알게 되었다” 며 “영화의 힘을 느낄수 있었다. 1980 보고지침에도 사초로 기록한 기자의 역할 기억해야 하며, ‘1980사북’은 영화가 아닌 기자의 역사이다”, “광주와 대비한 잊어진 진실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시사회를 본 소회를 말했다.
‘1980 사북’은 회사가 노조를 감시하고, 국가가 동원탄자 앞새워 광부의 노동운동 통제..
2022.1.27 재심에서 강윤호(사건 당시 무기고 습격 누명) 40년에 무죄 선고한 판사의 사죄처럼
이젠 사북항쟁 피해자들 국가의 사과 요구하고 있다.
고문피해자에 대한 구제의 시작.. 직권조사 필요..정부가 피해자 찾아야 한다.
상처의 무게. 피해자의 이후의 삶의 파괴는 스스로의 영향만이 아니다.
국가는 이제 이 물음에 답해야 한다.
이호철 기자 Josepharies7625@gmail.com n9jeb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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